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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머징 교회는 교회 개혁인가 교회 변질인가 - 잘못된 기독교 분별시리즈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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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상품/도서명 이머징 교회는 교회 개혁인가 교회 변질인가 - 잘못된 기독교 분별시리즈 10
판매가 22,500원
소비자가 25,000원
제조/출판사 부흥과개혁사
적립금 1,130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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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발행일 2011-10-25
판형/페이지 512p
ISBN 9788960922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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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우리는 특이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곳 서구, 풍요로움이 확산되어 가는 이 시점, 기독교 기관들은 늘어나고, 기독교 언론들은 많은 생산물을 쏟아 내고 있는 이 시점에서, 기독교 신앙 그 자체는 사위어 가고 있다. 최소한, 통계 자료들이 이 점을 말하고 있다.

서구를 벗어나, 기독교 신앙에 닥친 곤경은 유럽에서보다는 미국이 좀 덜한 편이다. 하지만 이것도 기독교 신앙이 겨우 수면 위로 코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미국 밖에서는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 유럽,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기독교 신앙은 익사 직전이다. 사라져 가고 있다. 공적인 삶에서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많은 교회가 텅텅 비고 있다. 소수가, 그나마 대부분 현실에서 동떨어진 신앙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독교 신앙이 융성하는 곳은 서구가 아니다. 필립 젠킨스 저서 『도래하는 기독교 세계』(The Coming Christendom)에서 명확하게 밝혔듯이, 아프리카, 아시아 일부 그리고 남미다. 이런 곳들에서는 기독교 신앙이 거의 경이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날로 격감하는 서구의 기독교 신앙이라는 역설은 오늘날 우리가 부딪쳐 있는 여러 역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보겠다. 지난 40년간 구매력을 기준으로 한 미국인의 평균 수입은 실제 배로 늘어났다. 지난 백 년 동안, 기대 수명은 거의 두 배가 되었다. 놀라운 의료의 발달 덕분이다. 현재 평균적인 미국인은 과학 기술과 풍요로 말미암아 완전히 변모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데이비드 마이어스가 『미국의 역설』(The American Paradox)에서 지적한 것처럼, 연구 조사에 따르면 우리는 덜 행복해하고, 더 침울해한다. 우리의 관계는 더 비밀스러워지고,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두고 있고, 툭하면 깨진다. 우리의 아이들은 도덕적으로 훨씬 더 해이하다. 직업적으로도 더 불안해한다. 물론, 이런 것들은 일반화되었고, 정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예를 들어, 풍요로운 미국의 한가운데에 빈곤 또한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근대화에는 의심의 여지 없이 여러 심리학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지지만, 삶에서 나침반을 발견하고 내면의 안정성을 획득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연구 결과가 이런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전체 미국인들이 그렇게 많이 소유하고도 그렇게 공허해할 수 있는가? 많은 연구 결과들이 보여 주는 것처럼, 왜 우리는 이런 낙원에 살면서도 그토록 만족을 못하는가? 디킨슨의 소설에나 나오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삶의 전성기와 악천후, 희망에 찬 봄과 절망스런 겨울이 함께 있다. 우리는 정말 잘 먹고 잘 살면서도 더 공허해한다. 더 가지고 있으면서도 덜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 역설을 교회에서도 확인한다. 우리에게는 없는 게 없다. 목사, 교회 건물, 프로그램, 교육 기관, 언론 매체, 라디오 프로그램, 텔레비전 프로그램, 교육 자료 그리고 성경이 있다. 우리에게는 세계의 다른 곳들에 심각하게 없는 것들이 넘쳐난다. 그런데도 그쪽의 기독교는 최소한 숫자로라도 번창하고 여기는 허덕인다.

서구에서 비서구 세계로의 이 전환의 아이러니는 문화적 관점에서 볼 때 더 경악스럽다. 미국에서 기독교는 문화적으로 널리 수용되던 바로 그 순간에 비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미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기독교 국가가 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어떤 사람들이 바랐던 것처럼 ‘반 기독교화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 기원에 관한 한, 미국은 신학적으로 말하면 잡탕이다. 오늘날에는 사실 반대하고 말 것도 없다. 잊지 말자. 미국혁명 당시 단 17퍼센트의 사람만이 교회에 출석했다. 비율로 보면 오늘날 신자 수의 1/3에 해당하는 숫자다. 그렇다면 이 문화적인 수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교회에 소속된다는 것은 아주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로 비춰진다. 그리고 직장에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다 해도 더 이상은 그 자체로 문화적인 비정상으로 비춰지지도 않는다. 바나(Barna)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미국인의 45퍼센트는 자신이 거듭났다고 말한다. 알다시피 이 말은 상당히 종교적인 개념, 특별히 기독교적인 개념이다. 이 정도 숫자의 사람들이라면 문화적으로 용인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기독교 전통에 있는 사람들이 포함되지 않았다. 이 사람들에게는 거듭남이 그다지 친숙한 것 또는 받아들일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러 교회에 출석한다. 전체 그림을 생각할 때, 미국은 상당히 종교적인 국가다. 종교적이다 또는 구체적으로는 기독교적이라는 것은 더 이상 기괴한 일이 아니다.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당당히 설 수 있는 해 아래 한 장소가 있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계몽주의가 미국 문화를 지배하고 있던 시절, 모든 종교는 현실에 부적응하는 유감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종교는 비이성적인 것이었다. 미신으로의 회귀였다. 사람들은, 종교, 그것도 초자연적인 것을 숭상하는 종교에서 전근대로의 퇴행을 본다고 한다. 근대인이라면 도저히 믿지 못할 무엇인가가 있다. 당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흔히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들로 변모했고, 필연적인 사회 진보의 개념을 철칙처럼 받아들였다. 그들은, 필요에 의해 존재했던 모든 종교가 사라지는 때가 오고 있다고 실제로 생각했고, 또 입만 열면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렇다. 이런 계몽주의적인 태도는 문화라는 자루 안에 잘 숨어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계몽주의라는 이념은 꾸준히 쇠락했다. 계몽주의는 포스트모던적인 에토스로 말미암아 모든 종교와 신앙, 모든 신념 체계 그리고 세계관, 모든 삶의 양식과 문화적 습성에 열린 태도로 대체되고 말았다. 지금 우리 역시 그 일부가 된 전 지구적인 문화에는 이런 면이 훨씬 더 반영되어 있다. 사실 아시아인들은 때로, 자신들이 이미 몇 백 년 전부터 포스트모던 입장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라면 그들은 정말 그렇다. 계몽주의적인 이성주의 아래, 기독교, 특히 성경적인 기독교는 대화의 장에 낄 수 없었다. 포스트모던의 태양 아래서 기독교는 다른 모든 견점과 더불어 환영받고 있다. 그러면 왜 이 환대의 순간에 몸부림을 하는가?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기독교인들은 근대적인 문화 안에서 살아가는 어려움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자각이 널리 인식되고 있다. 그게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고칠 것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개혁주의자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복음주의자들의 동맹에 찜찜한 눈길을 보내 왔다. 그들은 너무 많은 사역과 견점들을 엮어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신념들의 작은 핵심 주변으로 하나의 작업 관계를 형성했다. 개혁주의자들에게, 이 핵심은 너무 보잘것없어서 거기서 시작할 수 없었고, 게다가 그것이 고백적인 전통 또는 교회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개혁주의자들의 견해가 옳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만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가 시작되면서 빌 하이빌스의 주도로 상당수의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기독교 신앙이 실종되고 있고 복음주의 운동이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자기 복제를 충실하게 하고 있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이빌스와 그의 추종자들 다수는 실용주의적인 미국인들이 하는 짓을 그대로 했다. 하이빌스는 우리의 방법론, 우리의 세상을 의식하고 인간이 떠밀고 있는 비즈니스 전략을 신뢰했다. 우리가 기독교적 신념을 구해 낼 것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영감을 얻고, 디즈니월드와 같은 성공 기업체를 본뜨며, 바나의 통계 숫자를 따라가면서, 하이빌스의 윌로우 크릭 교회는 자신과 그 교회의 복음을 팔기 시작했다. 그 결과 윌로우 크릭 교회가 근거로 삼은 소비자 모델이 기독교를 그저 또 다른 상품으로 그리고 또 다른 대단한 소비자를 그 상품의 구매자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어느 시기에도 기독교가 고객 욕구에 춤춘 적이 없었고 그 희생이 성경의 진리인 적은 없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 모든 방향을 볼 때, 놀랄 일 아닌가? 45퍼센트가 자신이 거듭났다고 주장하고, 그 중 단지 7퍼센트만이 성경적인 신앙의 핵심 사항들을 간신히 알고 있다는 것 말이다. 정말 사정이 이렇다면, 시장 논리가 만들어 낸 대형 교회들의 수적인 성공은 아찔할 뿐더러 뭔가 호도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예배’에 2천, 5천, 만 또는 2만 명을 끌어들인다 한들 무슨 의미인가? 문화적으로 말해 어떤 운동경기에 2만, 3만 또는 5만 명이 모였다는 것보다도 덜 중요하다.

이머전트 진영에 있는 많은 사람을 등 돌리게 한 것은 바로 저 실속 없는 마케팅 중심적인 신앙과 그 신앙의 경박성이다. 경박성은, 마치 코카콜라처럼 널리 마케팅 되게 하려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는 요소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흥미로운 점이 있다. 그들은 마케팅 중심적인 신앙이 주는 공허함, 신비감 상실, 무미건조함에 진저리를 치지만 그들 자신 또한 마케터들이라는 것이다. 차이는, 하이빌스 진영이 좀 더 현대성에 익숙한 부머들을 마케팅 대상으로 삼았다면, 이머징 교회론자들은 포스트모던에 더 익숙한 X세대를 마케팅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뿐이다.

이 포스트모더니즘 지지자들은, 진리가 각 개인에게만 진정한 것인 세계에 익숙하다. 이 세계에는 삶에 대한 규범도, 절대 가치도, 도덕적인 판단, 특히 성과 관련한 시비가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는 각자가 얽매이지 않고 자기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비의(秘義)를 찾아낼 수 있다. 이런 태도는 대중적인 표현, 동시에 아주 세련되고 복잡한 표현으로도 표출된다. 이런 태도들은 이제 막 떠오르고 있는,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 그저 새로운 영성의 일부일 수도 있고, 근본주의를 경멸하고 객관적인 진리를 거만함으로 몰아세울 뿐 아니라 객관적인 도덕 세계를 야만적이며 아동학대 비슷한 것으로 연결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대속 교리를 거절하고, 구원은 다른 장소와 다른 종교들에서도 발견된다는 신념을 선양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하이빌스의 변절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서, 문화적 포로의 사례이며, 그 결과는 재앙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우리가 크게 놓치고 있는 대목이 하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서구 문화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잘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기독교 대학까지 수많은 기관들에게 허락된 풍요와 안전 그리고 언론 매체에서부터 선교 단체들에 이르기까지 이런 제도들에 주어지는 엄청난 편의 자체가 기독교를 지탱해 주고 있지는 못하다. 이런 바람직한 것들은 기독교라는 직조, 그 몸통에 관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꼭 기독교의 알맹이는 아닌 것이다. 기독교의 알맹이는, 많은 교회, 많은 책 그리고 숱한 사역에도 불구하고 문화로 말미암아 더럽혀지고 있다.

이것이 서반구에 있는 사람들이 미국 기독교에서 자주 발견하는 문제다. 그리고 서구가 미국의 기독교에 가르쳐 줘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여러분, 우리가 한 대로는 하지 마세요!’ 그들은, 물론 미국 기독교 역시 더 근대화한 세계로 들어가게 될 때를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 모든 놀라운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끔찍한 위험에 대비하기도 해야 한다.

주식 시장이 황폐화하거나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을 때, 전문가들은 시장이 언제 ‘바닥을 쳤는지’ 예민하게 살핀다. 시장은 둥근 둘레를 빙빙 도는 형태이고, 한번 내부적인 수정이 일어나고 나면, 의심의 대상이 되던 시장이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유 있어 보인다. 기독교 신앙 역시 이런 면이 있다. 기독교 신앙에도 순환이 있다. 몰락하기도 하고, 회복되기 전에 내부적인 수정을 거치기도 한다. 사사기는 바로 이것의 예증이다.

서구 기독교는 논란의 여지 없이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최소한 통계적으로 봐서 그렇다. 질문은 ‘바닥을 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일로 필요한 내적인 수정이 이뤄졌는가?’다. 내 견해는 이것이다.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는 것이다. 이것을 방지해 줄 조직적인 마법,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마법은 없다. 우리의 마케팅 천재들에게는 아무것도 나올 게 없다. 우리가 거기를 향해 호소하고 있는 특정한 세대적인 틈새가 무엇인가와는 관계가 없다. 수정해야 할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교회로서 움직일까가 아니다. 조직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부적인 문제다.

기독교는 진리에 대한 문제다. 우리 밖 그리고 우리 너머에 있는 진리에 대한 문제다. 이 진리의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에 그렇다. 역사적인 기독교,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것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성경에서 보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기독교는 언제나 이 점을 선언한다. 이와 같은 진리의 선언이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개신교적인 원리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독교는 우리가 진리의 사람들, 이 진리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경이에 사로잡히게 된 순결한 사람들이 될 때까지 계속 쇠락할 것이다. 오직 이것만이 삶을 다른 방향으로 틀기에 충분한 힘을 낼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의 삶은 지금 근대화와 포스트모던 세계의 거센 조류에 끌려가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그 내부의 조직과 삶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면 어떤 교회도 교회라는 이름을 갖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옷이 아니라 마음이다. 우리의 포스트모던 문화에 효과적으로 응전하는 열쇠는 바로 저것이다. 응전은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고려해야 할 유일한 질문은 아주 간단하다. ‘기독교는 문화와 일전을 벌일 것인가, 아니면 문화가 걸어온 싸움에 휘말릴 것인가?’

이 중립적으로 보이는 질문에는 여러 얼굴이 존재한다. 어떤 책도 이 점을 한꺼번에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책은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문화의 학문적인 극단에서 일어난 상호작용을 생각할 때,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은 이런 문화와의 교전에서 무엇을 하는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차례

기고자 소개 ┃ 6
추천의 글 ┃8
서문 ┃17

1장 성경에 대한 교리:
그저 인간에 관한 문제일 뿐

2장 ‘오직 성경으로’는 복음주의 신학의 방법론인가

3장 쉽지 않은 과제:
존 프랑케와 신학의 속성

4장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이머징 교회, 기독교 교의를 만나라

5장 구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바른 이성’과 신학적 미학:
‘신비주의적인 복음주의의 교권’의 재고

6장 코넬리우스 반 틸:
‘원칙을 지닌’ 신학자인가 아니면 기반주의자인가

7장 교회와 공동체인가 아니면 공동체와 교회인가

8장 예수의 사역을 ‘이머징’ 관점에서 읽는 것에 대한 평가와 토론

9장 치명적인 속도로 내리막 타기: 다양성의 어두운 그늘

10장 함정: 이머전트 교회 담론과 복음의 문화적 유폐

11장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음: 브라이언 맥클라렌의 지옥 교리 검증

12장 이머전트 교회

인명 색인 ┃ 556

 

저자

 

폴 웰스 악센 프로방스 개혁주의 신학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

존 볼트 칼빈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

폴 헬름 리버풀 대학교, 킹스 칼리지, 리젠트 대학 교수직 역임

스콧 클라크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회사 및 역사신학 교수

폴 코스 헬세스 세인트폴 노스 웨스턴의 기독교사상 조교수

제프리 와딩턴 미국 정통장로교회의 사역자

로널드 글리슨 그레이스 장로교회(PCA) 담임목사

가이 프렌티스 워터스 벨헤븐 대학의 성경 조교수

G. L. W. 존슨 애리조나 메사 리디머 교회 담임목사

그렉 길버트 앨 몰러의 조수

게리 길리 스프링필드의 서던 뷰 채플에서 목회

데이비드 웰스 고든코넬 신학교의 역사/조직신학 앤드루 멋치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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